우리 집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 형님, 나 삼부자는 음양이 기울어진 채 긴긴 세월을 보냈다. 내가 귀국한 며칠 뒤, 형님이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와서 우리에게 인사시키겠다고 했다.
형님이 아버지께 여자 친구가 조선족 유학생이라고 먼저 말씀했다. 아버지께서 반대할 줄 알았는데 도리어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며 “앞으로 중국이 최대강국으로 될 것이라면서도 사람을 평가할 때 국적이 중요하기보다 도덕성과 포용력을 기준으로 함이 더 바람직하다”고 피력했다.
시커먼 남자 셋만 사는 우리 집에는 그야말로 희소식이었다. 나는 예비형수가 어떤 사람인지 몹시 궁금하면서 온화한 성품이던 어머니 같은 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형님과 예비형수가 나란히 집으로 들어왔다. 사내들만 살던 집안이 갑자기 활기차서 아늑하고 따뜻한 기운까지 감돌았다.
“베이징 유학 마치고 며칠 전에 입국한 제 동생입니다.”
형님이 예비형수에게 주려고 꽃다발을 들고 마중 가는 나를 소개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어려운 중국어 석사를 마쳤다니 정말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도련님,"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약간 갸웃거렸다.
”반갑습니다. 형수님.“
가까이 다가가서 꽃다발을 전하며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는 순간 ‘앗’하는 신음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새어 나왔다. 심장이 얼어붙는 듯 하더니 세차게 요동을 쳤다. 바로 그 감미로운 목소리, 고개를 약간 갸웃하며 매혹적인 웃음을 발사하는 두 눈…….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현기증이 나고 금세라도 어디론가 튀어 나가려다가 가까스로 나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방문 틈을 타고 형님의 목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유학까지 갔다 온 녀석이 형수를 처음 보니 쑥스러운 모양이구먼! 허허허.”
방에 들어와서 두 손으로 책상을 짚고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나서야 겨우 머릿속에사 생명부지인 그녀와 일박 이일을 알몸으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역경을 헤치고 나왔던 추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4년 전 여름이었다. 중국으로 유학 떠나기 며칠 전 친구들과 강원도의 시원한 계곡을 찾아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한참 재밌게 노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밀려오고 천둥 번개와 함께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면서 계곡물이 점점 불어올랐다. 쉴 짬도 없이 퍼붓는 폭우에 불어난 계곡물이 마치 히말라야의 사나운 눈사태같이 포효하며 모든 것을 삼키려는 듯 밀려 왔다. 어쩔 사이도 없이 물건을 내동댕이친 채 뿔뿔이 산 위로 향해 뛰어 올라갔다.
산 위에 도착했을 때는 누런 흙탕물이 용솟음치며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다행히도 같이 왔던 친구들은 건너편 산 위에 올라가 있었다. 이때, 후미진 물웅덩이에 뜬 나무토막을 잡은 한 사람을 발견하였다. 나는 앞뒤를 가릴 겨를 없이 다짜고짜 물에 뛰어들어 그 사람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는 젊은 아가씨였다. 두 다리는 짧은 치마로 가려져 있었고 뽀얀 얼굴 위에 젖은 생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옷은 찢어지고 배가 부풀어 올라 물을 많이 먹었음을 알 수 있었다. 탈진하여 정신을 잃은 그녀를 재빨리 거꾸로 받쳐 들고 등허리를 두드리자 마치 펌프에서 물을 내뿜듯이 입으로 물을 토하며 간신히 눈을 떴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하늘에서는 차가운 비가 계속 내렸다. 옷이 다 찢어진 그녀는 저체온으로 마치 찬바람에 풀잎같이 온몸이 떨고 있었다. 나는 바지와 윗옷을 벗어 그녀를 감싸주고 비를 피할 자리를 찾았다. 마침 두 사람이 들어갈 만한 동굴이 있었고 바닥도 건조하여 그녀를 안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내 품에 안긴 그녀는 기력이 많이 회복되었고 두 눈에도 생기가 돌았다.
어두컴컴한 동굴은 두 사람 눕기에도 좁았다. 그녀는 정면으로 얼굴을 맞대고 마주 보며 나직이 속삭이었다. 그의 팔딱팔딱 뛰는 심장의 고동 소리가 봉긋하고 팽팽한 가슴을 타고 내게 전해왔다. 그녀와 나는 서로 격려의 뜻을 온몸을 통해 끊임없이 주고받았다. 동굴 밖에서는 계곡으로 흘러가는 물소리만 들리고 그녀는 더욱 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우리는 서로의 따뜻한 체온을 나누며 영혼과 육체가 하나가 되었고 어둠은 우리를 남김없이 모두 덮어 주었다.
다음 날 아침, 어둠이 사라지고 아침 해가 솟아올랐다. 밝은 빛이 어둑한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하룻밤을 같이 지낸 그녀는 기력이 회복되고 정신상태도 좋아졌다. 칠월 한낮은 또 무덥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내 옷을 벗어 나에게 돌려주었다.
옷을 벗어 돌려주면서 그녀는 관능적인 몸 전체를 나의 눈앞에 드러냈다. 날씬하면서도 유연한 곡선, 매혹적인 까만 눈동자에서 발사하는 귀여운 웃음…….
그녀는 뜻밖에도 조선족 아가씨였고 한국유학을 마치고 지금은 한국 기업에서 통역 일을 한다고 했다. 어제 회사의 동료들과 강원도에 피서를 왔다가 이런 일을 당했다며 얼굴을 붉혔다. 머지않아 곧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나는 그녀에게 이런저런 궁금한 것들을 묻기도 했다. 우리는 오래된 친구마냔 서로 편안함을 느꼈다. 그때 그녀가 한 말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분명 나를 좋아한다는 것도 느꼈다.
“한국에 와서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힘들었지만 이제는 적응이 많이 되었어요. 어쩐지 오늘부터 중국으로 가기 싫어졌네요. 호, 호, 호, 저는 오빠가 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그녀는 한국 여성들처럼 세련된 모습은 조금 미흡해도 고요한 물 위에 핀 연꽃처럼 청순한 모습은 더욱 나의 마음을 끌었고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고 있을 때는 한 송이 들꽃처럼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가씨였다.
우리는 다행히 조난자를 찾는 산악구조 헬기에 구조되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그녀를 입원시키고 나는 유학 떠날 준비로 이것저것 바삐 서둘러야 했다. 며칠 후 그녀를 한여름 밤의 아름다운 기억 속에 남겨둔 채 북경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북경에서 가방과 그녀의 연락처까지 모두 분실하여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아름다운 추억, 내 마음을 뒤흔든 한 순간의 인생사가 항상 마음속으로는 감회에 젖은 그날 밤의 추억과 순결하고 온유한 그녀를 잊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뜻밖에 그녀는 형님의 약혼녀, 즉 나의 예비형수 자격으로 내 앞에 나타났으니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당혹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사실 앞에서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 깊은 고뇌에 빠지며 막연하기만 했다. 어떤 이유와 원인을 불문하고 아무도 없는 동굴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온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이튿날 아침 그녀는 나를 보고 ‘도련님, 도련님’ 부르면서 별다른 기색 없이 아주 평온하게 다가왔다. 혹시 그때 탈진 상태에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을까? 혹시 기억하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일까? 나는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고 또 던졌다...
그녀는 그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와는 달리 나는 기억이 더욱 선명하고 생생하게 떠올랐다. 조용히 다문 싱싱하고 도톰한 입술, 매혹적인 두 눈…
만약 그 기억이 한 장의 사진이었다면 당장 끄집어내서 불태워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기억을 머릿속에 두고 한집에서 형수로 모시며 같이 생활한다는 것은 나 자신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휴대전화로 누구와 한참 통화를 하고 나서 생글생글 웃으며 곧바로 내 옆으로 다가왔다.
“도련님, 지방회사에 있는 저의 여동생이 마침 서울 본사에 출장 왔다가 시간이 있어서 새 형부와 도련님이랑 같이 점심을 하자고 하는군요. 도련님, 그때 가서 우리의 작은 비밀을 하나 알려드릴게요. 호호호.”
‘뭐, 비밀을 말한다고, 우리의 비밀을 말하면 절대 안 되지, 꼭 저지해야 해! 그리고 나는 빨리 이 집을 떠나야 해,’
떠나려면 오직 북경으로 가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경 유학할 때 지도 교수가 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언제든지 자기를 찾아오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우리 둘만 아는 비밀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도록 다짐받으려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이때, 나의 눈앞에는 한 폭의 그림이 펼쳐졌다. 뜰 안에 자란 목련에 눈부시게 새하얗고 커다란 꽃들이 만발했고 가지에는 이름 모를 섬세한 새 두 마리가 오르락내리락 놀고 있었다. 나무 밑에는 하얀 폴로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저 멀리 유유히 흘러가는 흰 구름과 만개한 하얀 목련화, 그리고 섬세한 새들을 정겹게 바라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의 표정은 그렇게도 밝고 편안하여 눈부신 꽃과 사람이 하나가 되었다.
그때 형님이 거실에서 형수님을 불렀다. 그녀는 사뿐사뿐 가벼운 걸음으로 집안에 들어갔다.
나는 혼자 담장 그늘 밑에서 머리를 숙이고 줄담배를 피우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가 이 집에서 떠나야만 제일 현명한 처신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일이라도 당장 북경으로 가기로 작심했다.
그때였다.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대문을 열었다. 내 앞에 그녀가 또 다시 나타났다. 금방까지도 내 집에 있었는데 어느새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을까?
뒷문으로 몰래 나왔을까?
머리가 무거워지고 눈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무엇을 말하려고 나를 찾아 왔을까?
“저기요, 한 가지 물어봅시다.”
정면으로 바라보며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얼굴이 환해지며 눈빛이 반짝였다.
“오빠!”
그녀는 다짜고짜 나의 가슴에 안기었다.
“아! 이러지 마세요, 안됩니다.”
아무 준비 없던 나는 당황하여 그녀를 밀쳐냈다.
“오빠! 저를 모르시겠어요, 4년 전 강원도 홍수 때 있었던 일 말이에요. 내가 오빠를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세요.”
가슴이 섬뜩했다. 이때 집안에서 그녀가 총총걸음으로 대문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생김새도 똑같은 아가씨가 마치 두 개의 똑같은 사과를 앞에 놓아둔 것 처럼 또 나의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도련님,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점심을 같이하자던 제 여동생이에요. 지금 지방기업에서 통역 일을 하고 있어요. 우리는 쌍둥이 자매예요. 많은 분들이 우리 쌍둥이는 너무 닮았기 때문에 오해와 실수하기가 다반사에요, 그래서 서로 갈라져 생활하고 있어요. 살짝 숨긴 비밀 때문에 놀랐죠? 그런데 너는 우리 도련님을 어떻게 알지?”
형수님은 나와 여동생을 번갈아 보며 의아하여 물었다.
이때, 나의 품에 안겼던 아가씨도 나와 언니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나도 헷갈려서 오빠가 언니하고 사귀는지 알았네. 그렇게 되면 나는 절대 사양하지 않을 거야. 언니, 이분은 내가 옛날부터 자주 말했던 강원도에서 나를 구해준 그 오빠여,”
"언니, 정말 그러면 우리 둘은 동서지간이 되는 거야? 흐흐흐.”
“그래, 우리는 쌍둥이 형제에 또 동서지간으로 겹쳐졌네, 정말 하늘이 내려 주신 절묘한 인연이야, 흐흐흐.”
그제야 모든 의혹이 밝혀지고 가슴속에 싸였던 시기와 불안한 마음이 봄눈 녹듯 사르르 녹기 시작했다.
이때, 형님도 4층에서 내려오며 이 광경을 보고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쌍둥이 처제로구먼. 말은 많이 들었는데 처음 보니 구분이 쉽게 안 되네. 둘이 생김새가 너무 닮아서 앞으로 어떻게 구분하지? 여하튼 우리 집이 경사 났네, 경사 났어. 쌍둥이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들어 왔네.”
“하하하.”
네 사람의 행복에 겨운 웃음소리가 봄 노래로 높고 맑은 하늘에 오래오래 퍼져 나갔다.
http://www.hmzxinwen.com/news/27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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